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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감상들/도서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는가 표지

 

이 책의 내용은 실제로 독일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논픽션이란 말인데 첫 번째 챕터를 읽은 순간부터 차라리 소설이길 바랐다.

 

12개의 사건들 중에서 ‘거부당한 배심원’, '리디아', '변호인', 이 세 개의 챕터가 인상적이었다.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 '인상적'이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지만.

 

‘거부당한 배심원’은 카타리나라는 여성이 챕터의 중심에 있다.

삶이 고독했던 이 여인은 아내를 학대한 남성이 가해자로 서는 재판의 배심원으로 지정된다. 카타리나는 배심원에서 제외시켜달라고 요청하지만 거부권은 없었다.

 

결국 재판장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카타리나는 피해자의 얼굴에서 자신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다.

이 일로 카타리나가 편파판정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검사의 요청에 따라 배심원에서 제외되는데, 문제는 예비배심원이 없어서 재판 자체가 무산되어 피고인 남성은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넉달 후... 그 남성은 망치로 내려쳐 자신의 아내를 죽인다.

이 일로 카타리나는 자신을 영구히 배심원에서 제외시켜달라고 장문의 편지를 법원에 보냈지만 요청은 기각되었다.

 

챕터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해당 사건에 관련된 법 조항이 쓰여있는데, 사건과 연달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우리를 지켜주는 ‘법’의 한계가 이런 것일까?

분명 카타리나가 배심원이 된 것도, 제외된 것도, 재판이 무산된 것도 모두 적법한 절차였다. 카타리나가 눈물을 흘린 행위가 잘못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챕터 ‘리디아’에서는 아내가 자신을 떠난 마이어벡이란 남자가 나온다.

인간관계에 서툴고 외롭고 고독했던 그는 우연히 리얼돌에 대해 알게 되고, 당장 자신의 취향대로 리얼돌을 주문한 후 ‘리디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함께 먹고 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그녀를 동반자로 여기게 되며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남들의 눈엔 인형이지만 그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오니 리디아의 목은 돌아가 있고 음부엔 양초가 꽂혀있었고, 벽엔 리디아를 향한 저급한 욕이 쓰여있었다. 마이어벡은 리디아를 씻겨주고 휴가를 내서 곁에 있으며 책을 읽어주는 등 진심으로 리디아를 위로하면서 이웃집 남자의 짓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한달 뒤, 이웃집 남자가 죽지 않을 만큼 폭행당한 채로 응급실에 실려갔고 마이어벡은 경찰에게 피 뭍은 야구배트를 내밀며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예상 밖으로 판사는 리디아를 마이어벡의 아내로 간주하고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하지만 정당방위는 공격을 받거나, 받기 직전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마이어벡의 행동은 복수로 판단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챕터의 마지막에는 정당방위에 대한 법 조항이 쓰여있었다.

하지만 난 판사가 ‘리디아’를 마이어벡의 반려자로 본 근거가 더 궁금하다. 그것에 관한 법 조항은 없.. 겠지?

그저 인간애만으로 그렇게 판단한 것이라면 판사에 따라 ‘리디아’는 사람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변호인’이란 챕터에는 변호사의 내적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가끔 ‘어떻게 저렇게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변호할 수가 있나?’라며 돈에 눈멀은 놈이라고 변호사를 욕 할 만한 사건을 보게 되는데 이 챕터가 바로 그런 사건을 변호사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주인공인 셰이마는 이슬람의 보수적인 교육을 뿌리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서 변호사가 된 여성이다. 변호사가 된 후 자신이 동경하던 변호사가 있는 로펌에 취직을 한다.

어느 날, 로펌에서는 인신매매와 성매매 등의 혐의가 있는 피고인을 변호할 사람을 찾게 되고 모두가 거부할 때 셰이마가 나선다.

 

사건을 파헤쳐보니 의뢰인은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출신 여성들을 속여 베를린으로 끌고 와 사창을 운영하는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피해 여성들은 마치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일하러 가는 줄 알고 왔다가 매춘을 강요당한 것이다.

하지만 물증이 없어서 증언이 있지 않는 한 그의 혐의는 입증되기 어려웠던 상황에 증인이 나타났다.

 

이 여인은 루마니아에서 베를린의 요양 보호사를 뽑는다는 말에 독일로 왔고, 들어오자마자 여권을 빼앗긴 채 매춘을 강요받았다고 진술했다. 거부하면 노숙자 같은 무리들에게 겁탈을 당해야 했고 매춘을 하면 하루에 십여 명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녀가 병이 들어 매춘을 거부하자 그 남자가 칼로 여자의 오른쪽 눈을 찔른 다음 병원 앞에 버리고 갔다. 여인의 얼굴에는 이마부터 턱까지 긴 상처가 있었으며 오른쪽 눈은 실명한 상태였다. 법정에서 여인은 지금도 두렵지만 아직 어느 곳에서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을 여성들을 위해 증언을 나섰다고 했다.

 

재판이 끝나고 셰이마는 변호사를 사임하겠다고 했으나 거부됐고 결국 피고인은 14년 6개월 형을 받는다.

하지만 항소심을 신청했고 다른 증거가 없었기에 역시 루마니아의 그 여인을 증인으로 소환했지만, 그 여인은 그때 법정을 나선 이후로 실종된 상태였다.

결국 다른 증거가 없었기에 피고는 무죄로 방면된다.

 

셰이마는 마지막에 억지로 입에 달달한 과자를 잔뜩 입에 넣으며 변호사 일이 이런 건 줄 몰랐다고 한다.

루마니아에서 온 가엾은 그 여성은 그 남자 조직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다. 셰이마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남성을 변호했다. 그녀가 디저트를 입에 넣고 있는 그 시각에도 그 남자의 조직원들은 활개를 치고 가엾은 여성들은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건을 보면 법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에 환호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챕터의 끝자락에 있는 법률 조항은 아래와 같다.

변호사 윤리장전 제19호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하여서는 아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