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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감상들/도서

마거릿 애트우드의『시녀이야기』

 

『시녀이야기』(페이퍼프로) & 『증언들』(리디페이퍼)

 

 

그 유명한 『시녀이야기』를 이제서야 읽었다. 후속작 『증언들』도 함께. 

 

몇년 전, 미드로 만들어져서 방영할 때, 나는 그때서야 원작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배경이 끔찍한 디스토피아라는 것도...

그래서 언젠가 원작소설만 읽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구입해뒀었는데, 시간이 지나 읽으려고 보니 그새 표지가 강렬한 레드로 바껴있다.

하긴, 『시녀이야기』하면 레드지.

하지만 환상문학전집의 통일감이 사라져서 조금 아쉽기도 한 것 같다.

 

 

 

『시녀이야기』 표지 구버전과 신버전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를 보아 그에게로 들라. 그가 아이를 낳아 내 무릎에 놓으면 나도 그를 통해 아이를 갖게 되리라. — 창세기 30장 1-3절

어느날 미국에서 쿠테타가 일어나 기독교의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길리어드' 정권이 들어선다.

길리어드는 남성 지배 전체주의 체제로서 이곳의 여성들은 그저 하등한 존재일 뿐이며 여성의 가장 큰 소임은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오브프레드'는 길리어드 정권이 들어서자 남편와 아이와 함께 도망쳤으나 붙잡혀 시녀가 된다.

출산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한 곳에 모여 '아주머니'라 불리는 존재에게 시녀 교육을 받은 다음에 아이가 없는 사령관의 집으로 배정됐다.

'아주머니'란 길리어드에서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이자 권력인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권력자인 '리디아 아주머니'는 오브프레드가 있던 센터의 여성들을 시녀로 교육시켰다.

 

 

 

책은 오브프레드가 시녀 교육을 받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래커 칠을 한 나무 바닥 위엔 한때 그곳에서 열리던 경기들을 위한 직선이며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 그물은 없었지만 링은 여전히 제자리에 달려 있었다. 실내를 빙 둘러 관중석으로 쓰던 발코니가 있었는데 그곳에 있으면 추잉 껌의 달콤한 흔적과 관전하는 소녀들의 향수 냄새, 그 속에 어우러진 자극적인 땀 냄새의 흔적이 희미하게 코끝에 닿았다.

체육관에서 시녀로서의 교육을 받은 다음, 프레드 사령관의 집으로 배정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주인공 여성의 이름은 '오브프레드'이며 사령관의 이름은 '프레드'이다.

영문으로 하면 Of Fred ..... 

 

그렇다. 이름은 '프레드 사령관의 것'이라는 뜻이다.

오브프레드와 함께 시장을 다니는 글렌 사령관의 시녀 이름은 '오브글렌'이었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聖杯)다.

여성들은 오직 출산을 위해 존재한다.

시녀들은 아이를 생산해야만 길리어드에서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데, 3번의 기회가 주어지고도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면 식민지로 추방되어 독극물과 방사능 폐기물을 처리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된다.

 

잠자리도 오직 아이생산을 위한 의례일 뿐, 그 의례조차 위의 성경구절을 해석해서 참으로 민망한 형식을 차린다.

먼저 사령관의 아내가 침대에 앉고, 시녀는 그 아내의 배 아래를 배고 누은 상태로 사령관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마치 사령관의 아내가 시녀와 한몸인 듯한... 이 무슨 막장인지?

 

출산 또한 비슷한 자세로 하게 되며, 출산과 동시에 아이는 사령관 부인에게 건네진다.

그리고 사령관 부인은 다른 사령관 부인들에게 축하를 받고 정작 출산한 시녀는 어둠 속에 방치된다. 살아남으면 다행이다.

아이와 산모 둘 중 하나를 구해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계산할 것도 없이 아이를 살린다. 시녀는 자궁의 역할일 뿐이다.

 

 

이것은 사건이다. 규칙에 대한 사소한 반항, 너무 사소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 반항. 하지만 이런 순간들은 어린 시절 서랍 구석에 차곡차곡 숨겨 둔 사탕처럼 나 혼자 남몰래 즐기는 달콤한 보상과 같다. 이런 순간들은 가능성들, 저 너머 세상을 엿보는 아주 작은 열쇠 구멍들이다.

지네들도 시녀가 절망할 상황인 것을 아는지 시녀의 방에는 자살을 시도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다.
목을 멜 곳도, 손목을 그을 것, 투신을 할 곳도 없다.

자신의 존엄을 지킬 아무런 수단이 없는 사회에서 오브프레드는 낙담하고 순응하기 보다는 사소하고 작은 반항을 하며 자신만의 삶을 이어간다.  예를 들어 성냥 하나를 숨겨둔다던가, 읽기가 금지돼있지만 무언가를 읽는다던가 하는 식이다.

(시녀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보도를 바라보다 여자들의 발을 보고 나는 그만 최면에 걸린 듯 매료된다. 그중 한 사람은 발가락이 드러나는 샌들을 신고 발톱에 핑크빛 매니큐어를 칠했다. 매니큐어 냄새가 떠오른다. 마르기 전에 너무 빨리 덧칠하면 쪼글쪼글해지던 모습이며, 실크 스타킹의 보드라운 감촉,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발가락이 샌들의 터진 앞코로 밀리던 느낌.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는 발을 바꾼다. 내 발에, 그 여자의 신발이 느껴진다. 매니큐어 냄새에 허기가 진다.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기억이 있기에 예상치 못한 때에 과거의 기억이 떠밀려오기도 한다.

이런 오브프레드의 고백에 나도 절로 공감했고 그렇게 더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의 제안이 위험천만하다는 건 잘 안다. 그에게도 그렇지만, 내게는 특히 더 그렇다. 그래도 나는 가고 싶다. 이 단조로운 일상을 깨뜨리고 겉보기에 점잖기만 한 이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

체제에 마음만은 굴복하지 않고 꿋꿋했던 오브프레드.

하지만 몰래 본심을 나누었던 오브글렌이 사라지고 새로운 오브글렌이 등장하자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이상 떠나고, 탈출하고, 국경을 넘어 자유를 찾고 싶지가 않다. 닉과 함께 여기 있고 싶다. 손닿는 곳에 그가 있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부끄럽다. 하지만 사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런 인정이 일종의 과시라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자긍심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내게 있어 그 일이 얼마나 극단적이고 정당화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령관의 부인 세레나 조이의 권유로 오브프레드는 운전사인 닉과 관계를 맺는다.
사령관의 부인은 아이가 중요했지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중요하진 않았다.

일회성의 만남이었지만 그 후에도 오브프레드는 계속해서 닉을 찾아간다.
들키면 둘 다 사형인데도 닉 역시 그런 오브프레드를 받아준다.

점점 닉을 사랑하게 되는 오브프레드. 그에 반해 닉의 속은 겉으론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일어난 일을 보면 닉 역시 오브프레드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관계를 이어가던 중에 오브프레드가 사령관의 부인의 눈 밖에 나는 사건이 발생하고...

오브프레드는 어떤 식으로 삶이 끝날지를 생각하고 있던 참에, 감시자들인 '눈'이 오브프레드를 체포하러 온다.

 

닉이 자신을 밀고했다고 생각하는 오브프레드.

그런 생각으로 절망할 때, 닉이 뛰쳐들어와 '메이데이'라는 지하조직의 암호를 말하며 자신을 믿고 저들과 함게 가라고 말한다.

 

감시자들의 등장에 사령관과 사령관의 부인 역시 놀라고, 체포되서 끌려가는 오브프레드를 보며 분통해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는 채로 오브프레드는 검은 벤에 오르며 그렇게 『시녀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가 끝나면 <『시녀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라는 부록(?)이 나오는데, 길리어드 연구학 제 12회 심포지엄의 속기록이란 내용인데 이게 참 흥미롭다.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 흘러~ 길리어드가 멸망하고, 길리어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연 제 12회 심포지엄이라는 건데 정말 기발하다 ㅋㅋ

여기서 발표하는 내용으로 우리는 오브프레드가 체포된 이후 어떻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발표자는 길리어드가 건재할 당시, 지하 조직의 주요 거점에서 30개의 녹음테이프를 발견했고, 그 속엔 어느 여인이 길리어드에서의 삶과 탈출과정을 녹음해뒀다고 한다.
그리고 테이프를 분석한 내용으로 인해 우리는 오브프레드가 무사히 탈출했음을, 그리고 후에 길리어드는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심포지엄에서는 책을 읽으며 독자가 궁금했을 법한 왜 출산율이 이렇게나 낮아진 것인지, 아주머니란 어떤 존재인지 등의 내용도 다루고 있어서 유익하다.

 

 

오브프레드가 무사히 탈출했고 길리어드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해도 『시녀이야기』의 찝찝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증언들』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어떻게 길리어드가 멸망했는지, 그 멸망하는 과정을 통쾌하게 지켜볼 수 있으므로!

 

 

『시녀이야기』만 읽었을 때 vs 『증언들』까지 읽었을 때